GJCU 연 Quarterly Webzine 2020년 Summer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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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dystopia]
디스토피아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세계 ‘유토피아[utopia]’의 반대말로서 현대사회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극단화된 어두운 미래상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디스토피아를 주제로 한 20세기 명작소설로는 감시정부와 통제된 사회를 꼬집는 1949년 작(作) 조지오웰의 1984와 기술만능주의를 비판하는 1932년 작(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언제나 거론되며 비교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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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1984’ 1949년 작(作)]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1932년 작(作)]

 먼저 조지오웰의 소설 ‘1984’는 집필 당시(1948년) 미래사회인 1984년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국가 오세아니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룹니다. 미래사회를 표방하기는 하나, 경직된 세상이기에 가난이 만연하며 생활수준이나 기술에 대한 묘사도 낙후된 편입니다. 정부에 의한 감시와 통제가 일상이 된 사회 ‘빅 브라더’라는 개념이 이 소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가상국가 오세아니아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전체주의 독재국가들처럼 정부와 당에 의해 통제받고 감시당하는 동시에 민중들도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입니다. 또한 이 책에서 주로 나오는 당의 강령으로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다.’

 이와 같은 모순된 문장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러한 모순된 문장들을 민중들이 아무런 비판 없이 세뇌되어 외치고 있는 묘사들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설 1984 속 세상은 핵전쟁과 혁명 이후 3대 초강대국만이 남아있는 사회이며 전파 속에서는 전염병이 만연하고 세 국가 간 소규모 전쟁과 국지도발이 끊이지 않는, 그러나 정말로 파멸에 이를 수 있는 전면전은 서로 암묵적으로 제쳐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정세와 혼란이 현실인지 정부가 보여주는 눈속임인지는 독자들조차 확신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당의 통제 이전의 시대를 자세히 기억하는 사람이나 역사적 사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는 일상화된 감시와 우민화 정책, 정부의 과도한 통제와 개입을 정당화시키는 사회혼란과 영구적인 전쟁으로 존속되고 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저에게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가 소설 속 ‘1984’를 오마쥬한 배경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암울한 소설 속 보다는 통쾌한 작품이기에 이 영화 또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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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의 주된 줄거리는 평범한 당원이자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가 어느 날 현 체제에 의문을 품고 일기를 쓰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이후에 정부의 끄나풀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줄리아를 만나 여러 일들을 겪고 오브라이언의 혁명세력에 가담하여 투쟁운동을 시작하려 하지만.. 이 부분부터는 설국열차와 유사한 반전을 보여줍니다.

 이후의 내용은 혹시 읽어보실 분들을 위해 서술하지 않겠습니다.

 조지오웰의 1984는 암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로 읽는 동안 답답한 마음을 갖게 하는 꽤 어려운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나 냉전시대의 역사가 전체주의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면, 6.25 전쟁에서 공산당에게 패배했다면 이런 사회가 나의 현재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누구도 믿을 수 없겠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이와 비슷할까 등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가상의 디스토피아를 다루지만 이미 그러한 사회를 보여주는 국가들은 주변에 있기에 신선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예상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반면에 이와 대조되는 디스토피아 세상이 있습니다.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입니다, 멋진 신세계는 책의 제목과 같이, 1984처럼 통제되고 탄압받아 가난하거나 기술발전이 더딘 어두운 세상이 아닙니다. 자본과 기술이 발달하여 모든 계층이 근심걱정 없이 만족한 상태이며 지극히 자유로워 보이는 밝은 세상이죠. 1984가 경직되고 통제된 사회의 폐단을 담고 있다면 멋진 신세계는 철저한 기술만능주의,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한 사회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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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속 배경은 약 500년 후 과학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가상의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전쟁 이후 세계정부가 들어선 상태이며 모든 인간은 인공수정으로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 조작을 통해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계급으로 나뉘는데, 알파는 엘리트, 베타는 중산층, 감마는 하위계층을 담당하며 엡실론 계급은 고의에 의해 지적장애를 부여받고 클론형태로 양산되어 단순노동을 담당하는 기계부품으로 묘사됩니다. 그렇지만 계급에 맞는 지능을 부여받고 끊임없는 세뇌교육을 받았기에 단순노동을 하더라도 하위계층들은 행복합니다. 오히려 상위계층은 머리를 많이 써야하기에 멋진 모습을 동경하면서도 자신이 하위계층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모든 인류의 양육과 교육은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며 태어나기 이전 아니, 부화되기 이전부터 각 계급에 맞는 조건반사와 세뇌 교육을 받는 세상입니다.

 촉감영화라고 하는, 촉감까지 느낄 수 있는 일종의 가상현실(VR) 오락수단이 주요 여가생활 중 하나이며, 모든 성애(性愛)는 방탕하다고 생각될 만큼 제약이 없습니다. 결혼을 하거나 한 사람만 사랑하는 연인관계는 이해할 수 없으며 추잡스럽다고까지 생각하는 사회입니다. 서로 원한다면 모든 사람과 잠자리를 가질 수 있지만 연애감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과 100년 전만해도 비혼이나 동거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비혼주의와 동거문화의 아주 먼 미래일지도 모르겠네요.

 더욱이 이 세계의 문명인들에게는 모든 근심걱정을 날려버리고 행복한 기분을 가져다주는 마약 ‘소마’를 복용하는 것이 사탕이나 초콜릿을 소비하는 것과 같이 합법적이며 자연스럽습니다. 이쯤 되니 독자들 입장에서는 꽤 멋진 세상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모두가 만족하는 사회이니까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선택과 자유의지, 사색하거나 고민할 자유까지 망각한 채 행복을 세뇌 받고,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책임윤리까지 상실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멋진 사회에서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외딴섬으로 유배되어 불온사상을 전파하지 못하도록 통제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버나드 마르크스는 우연히 이 선진화된 ‘문명사회’가 정착되지 않은 야만인 거주 구역을 방문하여 야만인 ‘존’을 만나게 됩니다. 존은 문명사회 국장의, 지금말로 하자면 혼외자식이었습니다. 국장은 임신해버린 여성을 야만인 거주 구역에 버려둔 채 혼자 문명사회로 돌아온 것이었죠. 이 세계에서는 임신이나 출산이 아주 상스러운 것으로 취급받는 사회이니 국장은 더더욱 회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버나드는 자신을 좌천시키려는 국장에 반(反)하기 위해 존과 존의 어머니를 문명사회로 데리고 옵니다. 존은 아버지의 나라인 문명사회를 동경했기에, 더욱이 주인공 일행의 여자와 이성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버나드를 따라 문명사회로 이동합니다.
존의 어머니는 오랜 세월 끝에 문명사회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에 감격합니다. 그러나 이내 흘러버린 세월과 자신만을 스쳐지나간 노화로 인한 우울감으로 소마를 과량 복용하게 되고 이로 인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존은 문화충격을 받고 행복을 세뇌당하는 문명세계에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이후 존은 문명사회에서 말썽을 일으키며 결국 이 책의 하이라이트인 총통과의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합니다.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이를 먹어 추해질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는 것이겠지?”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용어들이 낯설어 크게 와 닿지 않은 채 독서를 마쳤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세상의 발전과 변화를 바라보니 이 1930년대에 쓰인 이 책이 놀랍게도 현대사회를 넘어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첨단기술의 편안함과 쉽게 얻을 수 있는 빠른 쾌락을 즐기는 현대인들은 깊은 사색과 글 읽기를 멀리하고 감성과 낭만을 촌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더 자극적이고 쉽고 빠르게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만을 원합니다. 이러한 세태는 말보다 영상을 먼저 접하며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과 분별없이 자극적인 영상에 심취하고 따라하는 십대들을 볼 때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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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저명한 문명 비평가 ‘닐 포스트만’에 따르면, 오웰이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공포와 기만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올더스 헉슬리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욕망과 말초적인 자극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합니다. 오웰이 책을 금지할 자들을 두려워했다면, 헉슬리는 아무도 책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책을 금지할 필요조차 없어지는 세상을 두려워한 것이죠.

 두 소설은 이러한 두 형태의 디스토피아 사회가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변화하는 현재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급변하게 될 미래사회에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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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이승민
입학처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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