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JCU 연 Quarterly Webzine 2018년 Autumn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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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혁신의 아이콘이 된 사과를 만들어낸 두 괴짜 이야기

 “우리가 살다 보면,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이 등장해 우리의 삶을 바꿔놓습니다. 누구든지 한 번이라도 이러한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낸다면 매우 운이 좋은거죠.

 이런 의미에서 애플은 운이 정말 좋았습니다. 이런 혁신적인 제품들을 그동안 하나도 아닌 몇 개씩이나 세상에 내놓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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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우리는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이 제품은 애플뿐 아니라 컴퓨터 산업 전체를 바꿔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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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첫 번째 아이팟을 공개했습니다.

 아이팟은 우리가 음악을 듣는 방식을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음악산업 전체를 뒤흔들었죠.

 오늘 우리는 이러한 혁신적인 제품을 3가지나 선보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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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터치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와이드스크린 아이팟입니다.
둘째. 혁신적인 모바일 전화기입니다.
셋째. 상식을 뛰어넘는 인터넷 디바이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3가지의 기계가 아닌, 단 하나의 기계입니다.

오늘, 오늘부로 애플은 휴대폰을 재탄생 시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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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iPhone(아이폰)입니다."

 (이후 1시간 동안 관중들 멈추지 않고 박수와 환호)

 2007년 1월 8일 애플 Macworld행사 스티브잡스 키노트 내용 中


공부에는 흥미 없는 괴짜 천재 엔지니어 - 스티브 워즈니악

 스티브 워즈니악의 아버지는 군사 분야의 전자 엔지니어 전문가로 록히드사 미사일 개발자였다. 워즈니악은 일의 특성상 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히 모른다고 밝히지만, 그가 굉장한 엘리트 아버지를 뒀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릴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다양한 전기전자 실험을 했고 후의 회고를 통해 이때 대부분의 전자원리 지식을 이때 습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워즈니악은 어린 시절부터 실리콘밸리에 거주했는데 그곳에서도 가장 한가운데인 서니베일이라는 곳에 집이 있었다. 이 지역은 다양한 회사의 엘리트 엔지니어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는데, 동네 아저씨, 삼촌, 형들에게 자연스럽게 전자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할 수 있었고 아이들끼리 집안의 창고나 차고에서 꺼내온 부품으로 전기장치를 만들어 과학경진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포트란(과거 사용하던 1세대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에 관심을 가지며 컴퓨터 엔지니어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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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고등학교때라니 지금이 나은것같기도...

 그의 주변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초등학교때부터 수학과 과학의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IQ가 200을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콜로라도 대학교부터 버클리대학교까지 여러 대학을 거쳤지만, 사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다양한 기계를 만지고, 분해하고, 프로그래밍하며 원리를 밝히는 일에 더 매진했다.

 결국 버클리대학 컴퓨터공학과를 자퇴한 그는 당시 미국 최고의 전자제품 기업이던 HP에 입사, 전자계산기를 개발하는 엔지니어로 활동하게 되었다. (천재 맞다)

 이러한 그의 청년 시절 그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였던 빌 페르난데스를 통해 인생에 둘도 없는 파트너를 만나게 된다. 심지어 본인과도 같은 이름 스티브. 스티브 잡스였다.

 워즈니악과 잡스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음에도 동일한 관심사를 가진 최고의 친구가 되었다. 잡스는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떠올리는 것을 좋아했고, 워즈니악은 자신이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를 실현 시키는걸 좋아했으니 둘의 쿵짝이 제대로 맞았다고 볼 수 있겠다.

 쿵짝이 어느 정도로 잘 맞았냐면, 워즈니악이 71년도에 '휘슬러 조'라는 사건을 알게 됐는데 전화를 연결할 때 휘파람 등으로 특정 주파수를 발생시키면 전화를 하는 중인데도 과금은 종료되거나 누가 전화 한지 알 수 없게 되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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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와 잡스가 어릴때 만든 블루박스. 정말 남다른 재능이긴 한데...

 워즈니악은 이 사건을 듣자마자 스티브 잡스를 불러 전화 시 특정 주파수를 발생시키는 상자인 ‘블루박스’라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실제 구동되는지 시험을 하겠다고 로마 교황청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미국안보보좌관인 헬리 키신저이며, 중요한 이유로 교황과 통화가 필요하니 연결해달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두 괴짜가 만나게 되니 장난 또한 매우 상상초월이다. 요즘 시대였으면 FBI가 안방으로 쳐들어와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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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시니컬 했던 잡스와 달리 워즈는 언제나 유쾌했던 성격이라 현재까지 팬층이 두텁다


히피 문화에 심취한 괴짜 기획자 - 스티브 잡스

 생전 잡스는 어린시절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가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하다. 그의 생모는 보수적인 미국인 집안의 딸이었는데 시리아인이었던 아버지를 반대해 결혼이 무산되었고 결국 미혼모가 된 그의 어머니는 잡스를 낳은 후 입양을 택하게 된다.

 잡스의 양부모는 원래는 변호사 부부로 확정되어있었지만, 그들이 여자아이를 택하는 바람에 대기자 명단에 있던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기회가 찾아왔다.

 아이를 대학까지 교육받길 바랐던 친모 조앤 심슨은 잡스 부부가 둘 다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사실을 알고 아이를 보내는 것을 매우 꺼려해 서명을 거부했다. 하지만 잡스 부부가 반드시 대학교육까지 보내겠다는 약속을 해서 결국에는 스티브 잡스가 그들에게 입양된다.

 (이러한 친모의 노력에도 정작 본인은 대학을 중퇴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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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사진. 사진으로 보면 멀쩡해보이는데

 잡스는 청소년기 시절부터 흔히 말하는 돌아이로 불렸다. 그 당시 비행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환각제인 LSD를 수시로 흡입했고, 대학 때는 반문화주의와 히피문화에 심취되어 노숙자 생활을 오랫동안 하고 있었다.
(그 반듯해 보이는 빌게이츠도 히피 문화와 LSD를 경험한 걸 보면 당시 컴퓨터에 심취한 많은 이(너드)들에게 유행하는 문화였던 걸로 보여진다)

 그리고 워즈니악을 만나 다양한 전자기술 이론을 습득했다. 그는 엔지니어는 아니었지만 당시 북캘리포니아에 유행처럼 번지던 ‘전자제품’이라는 새로운 판도라의 상자를 관심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워즈니악은 잡스에게 좋은 스승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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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사후인 지금도 애플은 폰트디자인에 엄청난 집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레곤에 위치한 리드대학을 다녔지만, 가난한 데다가 배움에 흥미가 없어 친구의 집에서 얹혀 살며 붓글씨, 동서양 서체 강의나 인문학 강의를 청강형태로 들었다.

 (이때 공부한 서체는 훗날 애플이 그토록 집착하는 폰트 그래픽 발전의 시초가 된다)
결국 그나마도 중퇴하고 히피 공동체 마을에 들어가 젊음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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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산업 쇼크의 대명사 아타리

 이런 인생 패배자 같은 사람이 미국 엔터테인먼트산업 돌풍의 핵이었던 게임회사 아타리(ATARI)에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다. 1974년 아타리 본사 로비에는 거지꼴의 청년 한 명이 드러누워 일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여기서 나갈 수 없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타리의 인사담당자는 ‘퐁’의 성공으로 더군다나 엔지니어가 부족한 상황에서 도움이 될까 하고 아타리의 수석엔지니어인 앨런 알콘에게 누워있던 잡스를 데리고 간다. 19세의 깡마르고 냄새나는 히피 청년을 보고 앨런 알콘은 황당했지만 왠지 그의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타리의 창업자인 놀란 부쉬넬에게 잡스를 데리고 갔고, 부쉬넬 역시 웬 지저분한 놈이 쳐들어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의 호기가 마음에 들어 채용하기로 했다. 1970년대 폭발적으로 산업이 성장하던 미국 전자기업의 문화가 얼마나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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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리의 대인배 놀란 부쉬넬과 앨런 알콘(왼쪽부터)

 하지만 문제는 다음날부터 일어났다. 잡스는 엔지니어 기술 쪽에서는 지식이 전무했다. 다행이도 열정은 있었고, 그는 스스로 야근까지 자청하며 공부에 매진했다. 자유분방한 게임기업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경영자였던 놀란 부쉬넬은 그의 탁월한 상상력과 기획능력을 높이 사서 야근수당 제도까지 만들며 그를 응원했다.

 당시 놀란 부쉬넬은 브레이크아웃이라는 일명 ‘벽돌 깨기’ 게임을 준비 중이었다. 모든 것이 다 좋은데 게임기판 하나에 사용되는 칩이 너무 많았다. 원가 절감을 위해 그는 회사직원들에게 시제품 회로에서 50개 미만으로 칩의 개수를 줄이면 줄인 만큼 현금으로 보너스를 주겠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회사에서 개발을 제일 못하던 스티브 잡스가 이 이벤트에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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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에겐 천재친구가 있었다

 그에게는 믿고 쓰는 천재 엔지니어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만에 워즈니악은 150개의 시제품을 44개의 칩만을 사용해 구현해냈다. 부쉬넬과 아타리의 모든 직원들은 경악했고, 약속대로 잡스에게 보너스를 줬다.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고맙다며 보너스 중 350불을 줬고, 워즈니악은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훗날 나이가 들어 보너스의 총금액을 알고 워즈니악은 매우 분노하게 되는데, 잡스가 당시 놀란 부쉬넬에게 받은 보너스의 총액은 5,000달러였다. 친구에게조차 사기를 치는 그의 장사수완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퍼스널 컴퓨터(PC)의 등장 - MITS 앨테어 8800

 당시 컴퓨터는 무지막지하게 크고 복잡한 연산을 하는 거대한 계산기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최초의 컴퓨터 애니악같은. 연구소에서나 쓸법한 거대한 규모의 컴퓨터를 떠올렸다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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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느낌일테니 개인이 사용한다는건 꿈도 못 꿀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인들에게 ‘개인용 컴퓨터’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고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기껏해야 전기를 꼽아 쓰는 회사용 계산기나 텔레비전이 전자제품 중 가장 복잡한 전자기기에 속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전자산업의 눈부신 발전이 있었던 시기였다.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또 IC칩으로, 진화된 @반도체로. 작은 칩 하나에 수많은 연산처리능력을 부여할 수 있는 기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잡스와 워즈니악이 만나던 즈음에 MI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try Systems)라는 회사가 있었다. 이곳은 원래는 RC자동차나 로켓, 비행기등을 취미로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각종 기구와 칩들을 키트(KIT:부품을 제공하고 사용자가 조립)형태로 판매하던 회사였다.

 생각보다 판매가 시원치 않자 그들은 KIT를 제작하는 자신들의 장기를 살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한 제품을 출시한다. 개인이 컴퓨터 제작을 할 수 있는 키트인 ‘앨테어 880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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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테어 8800. 어휴 옛날 컴퓨터 느낌이 어휴

 앨테어 8800은 다양한 잡지와 신문에 소개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팔려나간 이 제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개인이 사용하는 컴퓨터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고, Personal Computer. PC라는 말이 이때부터 태생하게 된다. (그리고 MITS의 유명한 두 직원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게이츠와 그의 스승 폴앨런이다.)


애플 컴퓨터의 시작 - APPLE I

 잡스도 이러한 개인용 컴퓨터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워즈니악은 특별한 목표 없이 자신의 취미만을 즐기는 직장인이었지만, 스티브잡스는 이 산업이 분명 엄청난 돈이 될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둘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라는 개인용 컴퓨터 개발 클럽에 가입하고 난 뒤, 자신들이 직접 컴퓨터를 만들어 클럽 전시회에 출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이 역시 모든 계획을 스티브 잡스가 세운 뒤 워즈니악을 설득해 만들어진 결과였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의 한 허름한 창고에서 애플1을 만들기 시작했다. 알테어 8800과 매우 유사한 형태였다.

 워즈니악이 천재성을 발휘해 설계한 덕에 전시회에서 구동 시연을 본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고, 잡스와 워즈니악은 이 APPLE I을 제품화 시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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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함께 살다시피 하며 제품을 개발했다

 처음에는 자체 생산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해 워즈니악이 근무하던 HP를 찾아갔다. 하지만 거대한 기업의 구조상 의사결정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늦었고, 결국 둘은 76년도에 애플컴퓨터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집에 돈이 될 것 같은 제품들은 전부 팔아 부품을 수급했다.

 (당시에도 워즈니악은 APPLE I을 팔아서 돈이 될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친구인 잡스의 설득에 자신의 고가 전자계산기를 판 것을 보면 그야말로 진정한 의리를 아는 사나이가 아니였나 싶다. [아니면 잡스가 약을 잘 팔았거나...])

 복잡다단한 일들이 거듭된 끝에 1976년, 시제품 ‘APPLE I’ 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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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APPLE I.
구동 가능한 오리지널 APPLE I은 전 세계 7대뿐이며
그중 1대를 제주 넥슨컴퓨터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APPLE I은 초창기 200대 정도가 빠른 속도로 팔렸다. 매우 소량 같지만 당시 대당 가격이 매우 비싼 편에 속했기 때문에 회사 창업 후 거지꼴이었던 잡스와 워즈니악은 판매 속도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모험 삼아 만든 제품이 인정을 받고 빠르게 팔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전국의 전자기기 대리점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주 문의가 왔다. 다만 혹시 더 안정적이고 사용하기 편하게 완성된 제품은 없냐는 문의가 많았다.

 둘은 제대로 만들면 많이 팔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정인이 아닌 일반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만한 진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이렇게 APPLE II의 제품 개발이 시작되었다.


시대와 인류를 뒤흔든 개인용 컴퓨터의 혁신 - 애플II

 APPLE II 발매 이전에는 PC를 알테어처럼 키트로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행여 APPLE I 같은 마더보드를 구입했다 하더라도 파워서플라이도 따로 구매해야 하고, 전원을 잘못 연결하면 기판이 전부 숯덩이가 되어버리기도 하고, 키보드 마우스도 따로 구매해야 하며 모니터도 따로 구매. 심지어 연결을 시키려면 지식이 전무한 사람은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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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I의 성공 후 두 사람의 외모도 멀쩡(?)해졌다.
그리고 워즈의 애사심 넘치는 벨트가 인상 깊다(...)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판매 형태가 시장 확장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판단하고 소비자들이 티비나 당시 유행하던 게임기처럼 그냥 제품을 구입해서 전원만 꽂으면 돌아갈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가전제품 파는 점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컴퓨터도 텔레비전처럼 케이스를 플라스틱으로 제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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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시작 APPLE II. 지금봐도 디자인이 멋지다.

 최초 판매가는 1298달러로 정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한화 550만원 정도였다. 키보드가 달린 일체형 컴퓨터 본체에 모니터를 올려놓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고 표준 인터페이스 확장슬롯이 있어 다양한 기기를 연결할 수 있었다. 출시와 동시에 소비자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동안 상상할 수 없었던 디자인이 무려 ‘개인용’ 컴퓨터로 나왔던 것이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소비자들의 마음을 끌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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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는 존 스컬리 전 애플 CEO. 원래는 펩시의 최연소 CEO였으나 잡스가 그를 찾아가
“평생 설탕물만 팔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꿔보고 싶습니까?”
라는 말 한마디를 던지자 애플의 최고경영자가 된 마케팅계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후에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이 존 스컬리가 해고했다.

 그리고 1979년, 댄 브릭클린이라는 프로그래머가 APPLE II 전용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인 비지칼크(VisiCalc)를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기업과 회계 담당자들에게 APPLE II는 신의 기계로 등극하게 된다. 회계사무원 몇십 명이 동원되어 계산해야 할 것들을 데이터 입력 몇 번으로 컴퓨터가 몇 초 내에 결과값을 도출해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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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면 뭔가 싶지만 당시엔 이 비지칼크가 산업계의 혁명 그 이상의 도구였다

 비지칼크의 등장으로 인해 사회적인 파급효과 또한 엄청났다. 실제 회계 담당자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몇백 대의 APPLE II와 비지칼크를 구입해 사무실에 비치했다.

 APPLE II로 인해 인건비는 줄어들고 일의 시간과 효율은 늘어나니 기업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구입해야 하는 물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APPLE II로 인해 퍼스널 컴퓨터라는 이름이 탄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비즈니스 컴퓨터 시장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잡스와 워즈니악은 순식간에 억만장자의 반열에 올라갔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스티브 잡스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0년 내에 매출 5억 달러를 이뤄내겠다!’는 황당한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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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기기까지 해서 인기도 많았던 거만한 억만장자 청년 스티브 잡스

 사람들은 비웃었다. 아무리 APPLE II가 잘나가도 5억 달러면 당시 전 세계 100대 기업 정도에 들어야 하는 규모였다. 현재의 한화로 환산해도 6천억 원인데, 당시엔 천문학적인 규모였을 것이다.

 그런데! APPLE II 출시 5년 만에 잡스와 워즈니악은 매출 5억 달러를 실제로 달성해버린다. 북미와 유럽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APPLE II의 복제품을 생산해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담으로,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퍼스널 컴퓨터 붐이 번져서, 돈만 주면 미사일도 만든다던 청계천 세운상가에 가면 모든 상점에 APPLE II 복제품이 하나 정도씩 있을 정도로 불법복제가 만연했었다. (프로그램도 아니고 하드웨어 복제라니)

 지금이야 애플의 높은 기술력과 자본으로 카피가 불가능한 제품을 생산하지만 APPLE II 시절에만 해도 플라스틱 금형을 제외하고는 시중에 유통되는 칩을 보드만 설계해 납땜하고 판매하는 형식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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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는 상당히 잘 만든 축에 속하는거고 대부분 막 만든 금형...

 지금은 추억이 된 당시 한국의 애플 삼보컴퓨터는 심지어 애플 공식 복제품을 팔았다.(응?) 어떻게 공식이라는 단어가 붙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그리고 그때 정품이던 클론이던 널리 보급된 APPLE II를 접했던, 지금 IT업계를 선두지휘하는 수많은 CEO들은 자신의 인생 최고의 컴퓨터로 단연 APPLE II를 꼽는 경우가 많다.

 APPLE II는 컴퓨터가 넘볼 수 없었던 가전제품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나아가 퍼스널 컴퓨터가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기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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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로드러너, 페르시아의 왕자 등 수많은 게임이 APPLE II 전용으로
처음 개발되어 판매되었다. 필자도 참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APPLE II’ 로 인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둔 스티브 잡스는 원래 성격도 그랬지만 점점 더 남의 말은 듣지 않는 돌아이 괴짜의 면모를 보이며 기고만장해져 가고 있었다.

 다음 웹진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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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Team Cheongs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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