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JCU 가족마당
    [세계역사문화탐험]
    세계문화역사이야기
    #6.오키나와, 잃어버린 이름 ‘류큐’ 해양 왕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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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에서 태어난 왕국

     지금의 오키나와는 일본 최남단의 섬이지만, 과거 이곳은 일본도, 중국도 아닌 독립된 해상 왕국이었다. 15세기 초, 오키나와 본섬은 북산, 중산, 남산이라는 세 나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던 1429년, 중산의 왕자 쇼하시가 세 나라를 통일하며 류큐왕국을 세웠다. 수도 슈리에는 성이 세워졌고, 왕국은 곧 동아시아 바다를 잇는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류큐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중국, 조선, 일본, 동남아시아까지 오가며 향료·은·비단·도자기 등을 거래했다.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정식 국가로 인정받은 류큐는, 각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만의 언어, 음악, 의복, 신앙을 발전시킨 ‘바다 위의 다문화 사회’였다.

    ● 조선과 류큐 - 해상으로 이어진 우정

     류큐와 조선의 관계는 단순한 무역을 넘어선, 서로를 존중한 평화 외교의 모범 사례였다. 15세기 이후 양국은 꾸준히 사신을 교환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 사절단의 방문과 학문 교류, 선물 교환 기록이 남아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난 직후 류큐가 명나라에 “조선을 도와야 한다”는 취지의 외교문서를 전달했다는 사료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팽창주의를 인식하면서도, 류큐는 정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외교국가로 남고자 했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일본 사쓰마번의 강요로 일부 자원을 제공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류큐는 외교적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작은 해양국가의 고뇌 속에 있었다.

    ● 사쓰마의 그림자 - ‘이중외교’의 탄생

     1609년, 일본의 사쓰마번은 오키나와를 침공했다. 이후 류큐는 형식상 독립국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사쓰마의 지배 아래 있었다. 에도막부는 해외무역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류큐를 통해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을 비밀리에 유지했다.
    즉, 류큐는 일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척하면서 일본의 경제 이익을 대신 챙겨주는 ‘가면 국가’가 된 셈이다.
    그 결과 류큐는 두 얼굴의 외교를 해야 했다. 일본에는 속국으로, 명나라에는 독립국으로 보이게끔 행정과 의례, 언어까지 철저히 이중화했다. 이는 해양왕국 류큐가 ‘생존을 위한 외교술’로 선택한 불안한 균형이었다.

    ● 메이지 유신과 병합 - 사라진 왕국의 날

     19세기 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며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류큐처분’이라는 이름으로 왕국을 완전히 병합했다. 1879년, 류큐왕국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오키나와현이 탄생한다.
    왕족은 폐위되었고, 슈리성은 행정청사로 바뀌었다. 일본은 이를 “근대 국가로의 귀속”이라 포장했지만, 류큐인에게는 주권을 빼앗긴 날이었다. 오키나와는 이후 제국주의의 전진기지로 편입되며, 본토 방위의 최전선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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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키나와 전투 - 민간인의 섬이 된 전장

     1945년,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패선’으로 선택됐다. 하지만 이 방패는 민간인의 희생으로 유지됐다. 일본군은 동굴을 요새로 삼고, 민간인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하거나 아이와 노인을 군용 굴속에 숨긴 채 미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결국 2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오키나와의 상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국제정치 속의 오키나와 - 바다를 둘러싼 시선들

     사실 류큐 병합 이후, 미국과 중국도 이 섬의 행방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79년, 세계 순방 중이던 율리시스 S. 그랜트 전 미국 대통령은 청나라를 방문해 당시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에게 일본과 오키나와의 ‘공동관리’ 가능성을 제안했지만, 청은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장제스에게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중국이 맡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장제스는 “중국이 욕심을 부린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이를 거절했다. 이는 당시 중국이 해양보다는 대륙 중심의 전략을 우선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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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체성과 기억 - 여전히 이어지는 이야기

     전후 오키나와는 미군 통치 아래 있다가 1972년 일본으로 ‘복귀’했지만, 오늘날에도 주일미군 기지의 70% 이상이 이 섬에 집중되어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군사적 부담 속에서도 자신들의 언어와 예술, 신앙을 지켜내며 “우리는 여전히 류큐인이다”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오키나와 출신 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국가행사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한 사건이 있다. 그 행동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 고통을 기억하는 침묵의 표현이었다.

    ● 바다에서 온 나라, 기억 속에 남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남쪽 끝에 있는 섬이지만, 한때는 동아시아 바다의 중심에 있던 왕국이었다. 그 왕국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문화와 정체성은 여전히 바다 바람 속에 살아 있다.
    우리가 여행지로만 바라보는 그곳에는, 제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잃어버린 이름의 역사가 조용히 숨 쉬고 있다.

    글, 사진 : 교무처 양성주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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