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역사문화탐험]
- 세계문화역사이야기
- #4.천년의 고도 콘스탄티노플 불타오르다
천년의 고도, 콘스탄티노플은 단순한 도시를 넘어 문명의 심장으로, 그리고 동서양의 운명이 충돌하던 격전지였다. 찬란한 황제들의 행렬, 금으로 장식된 교회, 바다 위를 누비던 상선들과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성무기들이 이 도시의 삶과 죽음을 함께했다. 이 글에서는 그 치열했던 역사의 핵심 장면들을 되짚으며, 콘스탄티노플이 어떻게 불타올랐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로마의 황제이자 기독교를 공인하였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고대의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던 비잔티움 땅에 세웠던 이 도시는 말 그대로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를 뜻하고 있다. 395년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면서 이곳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특히 서로마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 이후로도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상징성이 있는 도시였다. 천 년 가까이 이 도시는 동로마 제국의 중심으로, 신앙과 권력, 문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거대한 무대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위치를 보면 아시아와 유럽을 잇고 있으며, 흑해와 지중해의 길목에 위치하여 있다. 이러한 지형적 이점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역의 요충지로서 발전하였다. 고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수십만의 인구가 이곳에 살았으며, 성 소피아 성당은 신의 권위를 상징하며 하늘을 찔렀고, 삼중 성벽은 그 어떤 외적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엄청난 부와 경제력을 가졌던 도시 그곳이 콘스탄티노플인 것이다.
이러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그 지형적 이점 때문에 더더욱 침략자들의 공격을 수 없이 많이 받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콘스탄티노플은 당대 누구도 함락할 수 없는 철옹성을 자랑하였다. 강고한 성벽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바닷길 사이 황금뿔 만 입구에 친 쇠사슬을 기반으로 수많은 침략 전쟁을 이겨내고 마지막 남은 로마의 정통성과 기독교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찬란함 뒤엔 불안이 도사렸다. 11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면서 이 도시의 운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교황의 명령이 무색하게 상업적 이해와 정치적 갈등 속에 방향을 틀어,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유린당했고, 성당의 금은보화는 약탈되었으며, 성상과 성물은 파괴되었다. 형제의 손에 형제가 학살당한 이 사건은 단순한 전쟁을 넘어 문명의 자해로 평가받으며, 동서 기독교의 균열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 침략은 동로마 제국의 군사적·경제적 기반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혔고, 제국의 쇠락은 급속도로 가속화되었다.
시간이 흘러 동쪽의 거대한 제국이 힘이 차오르고 있었으니 오스만 제국의 출현이다. 당시 오스만은 아직 그 세력이 크지 않았으나 새로 술탄에 자리에 오른 메흐메트 2세는 새로운 제국의 발전과 확장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게 된다. 그는 헝가리 출신 기술자 우르반을 고용해 당시로선 전례 없는 초대형 대포를 제작하게 했다. 우르반 대포는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크기와 포탄의 크기로 운용을 위해선 200명이나 요구되었던 거대한 포였다. 그러나 그 거대함 때문일까. 우르반 대포는 열기로 인해 하루 발사량은 최대 2회뿐이었고 이러한 제한은 성벽을 무력화 하는데 제한이 있었다. 다만 이 대포는 비록 성벽을 완전히 붕괴시키진 못했지만, 전통적으로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삼중 성벽을 반복적으로 공격하며 심리적·물리적 압박을 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압도적인 전력과 도시를 둘러싼 수많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우리가 이미 아는 오스만의 승리라는 결과와 다르게 모든 전쟁 기간 내내 오스만이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나 당시 유럽은 철갑옷으로 둘러싼 중무장을 한 반면 오스만 제국의 병사들은 그 무장의 정도가 유럽의 중무장과는 차이가 있었다. 특히나 당시 유럽은 용병제에 의한 용병들이 많았는데 그중 명망 있는 용병집단이었던 제노바 용병단 700명이 콘스탄티노플을 구원하기 위해 합류하였고 이들은 다양한 전투 경험을 가진 용병들로 그 전투력은 상당히 높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콘스탄티노플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유럽의 국가들은 콘스탄티노플의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황의 제도의 밖에 위치하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구제하기 위해 지난 수차례에 이은 십자군 전쟁과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사정이 어려웠던 서유럽 각국이 지원을 꺼려했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이 제4차 십자군의 침략과 지속적인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재정적 여력이 소진되어 스스로 버티기 힘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노플은 최대 전성기엔 전시에도 3년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구비되어 있었고 지하에 대형 수조가 3곳이나 존재하여 어떠한 전쟁도 이겨낼 수 있었으나 재정적 여건이 소진되면서 식량도 충분하지 못하였다. 수많은 오스만의 대군에 둘러 쌓인 콘스탄티노플은 그렇게 외로운 사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변수가 있었으니 오스만도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나날을 지속 공격하면서 오스만 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오스만 주변국의 정세에도 변화가 일어나면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워진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새로운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게 된다. 수많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최후의 공격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오스만 군대의 최후의 공격을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모든 시민들도 느낄 수 있었다. 수만의 시민들은 성벽을 돌며 기도하였으며, 또한 소피아 성당에 모여 철야 기도를 진행하였다.
1453년 5월 29일 새벽, 오스만군은 총공세에 돌입했다. 다시 한번 벌어지는 치열한 사투 속에 도저히 무너지지 않은 콘스탄티노플을 보며 오스만의 술탄의 직속부대인 예니체리조차 공격의 의지가 꺾일 무렵 뜻밖의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커다란 혜자와 3중의 성벽으로 공격을 이어가지 못하던 오스만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의 군사들이 오스만의 후미 공격을 위해 오가던 외각의 작은 문을 단속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겨우 50명 정도의 오스만 군대가 그 문을 통해 침투하였고 성의 방어 병력이 충분하지 못하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병사들은 그들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성벽 곳곳을 휘젓던 50명은 가장 높은 성벽에 오스만의 깃발을 꼽았고 그것을 본 콘스탄티노플의 수비대는 점령당했다는 공포감으로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천년의 도시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최후의 항전 끝에 직접 검을 들고 전사하였으며, 성당들은 약탈당하고 불에 탔으며, 시민들의 비명과 종소리가 도심을 뒤덮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천년 제국 동로마의 역사는 비극적인 막을 내렸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멸망의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중세의 종언이자 근세 세계의 서막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 도시를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아 이스탄불이라 개명했고, 이후 수세기 동안 문화, 종교, 상업이 공존하는 다층적 도시로 성장시켰다.
콘스탄티노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묻는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찬란한 유산만이 그 본질인가, 아니면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정신인가? 그 답은, 불타오르던 성벽과 마지막까지 싸웠던 이들의 기억 속에서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되기 전날 밤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신하들에게 전한 말로 마무리를 하려 한다.
“내가 너에게 지금까지 잘못한게 있다면 모두 용서해다오. 남자라면 목숨을 버려야 할 4가지가 있다. 가족과 나라와 주권과 자유다. 이것을 위해 내일 생명을 바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