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JCU 연 Quarterly Webzine 2019년 spring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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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상과 함께 대화하다

 현대사회의 우리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들 사이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는 역사와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현재도 많은 이들이 자신이 따르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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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이 화재가 되었습니다. 엄숙한 분위기의 강론 시간에 한 소녀가 갑자기 단상에 올라와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았는데요. 보통이라면 아이를 내려보냈겠지만, 교황은 "소녀를 그대로 두라"며 신도들에겐 병과 싸우는 소녀에 대해 기도했는지 물었습니다. 예상 밖의 상황에서도 당황하기보다 친근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중세 시대의 교황의 권위와 권력에 대해 많은 내용들을 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교황의 행보는 지난 역사책에서 알던 정보와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물음을 던진다면,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자국의 언어가 아닌 라틴어로 미사(가톨릭의 제사)가 거행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신지요. 중세적 위치에 머물렀던 로마 가톨릭(천주교, 이하 가톨릭)이 근대화에 따라 어떻게 세상의 변화에 발을 맞추어 변화하였는지에 대해 오늘 글에 언급해 보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20세기 후반 가톨릭교회 역사는 개신교를 대적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수립한 정책과 태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동시에 가톨릭교회 내에는 산업혁명과 함께 변화하게 된 현대의 동향들을 일괄적으로 거부하고 정죄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습니다. 20세기 초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모습에 비판하며 시대의 변화에 맞추고 가톨릭교회의 변화를 요구하던 세력들은 거듭 자신의 견해와 대안들을 제시했으나 무시되거나 억압당했습니다. 따라서 20세기 초반 60년 동안의 가톨릭교회 역사는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현대 세계의 도전에 대응하여 교회를 개방하고 보다 창의적으로 대처하기를 원하는 세력들 간의 갈등의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가톨릭이 현대의 가톨릭의 모습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은 한 사람의 영향이 매우 지대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착한 교황이라 불리는 요한 23세입니다.



시골신부를 꿈꾸던 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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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

 1881년 12월 25일 소토일 몬테(Sotto il Monte)에서 소작농의 1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론 칼리(요한23세)는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재능이 있었던 것을 안타까워했던, 당시 지역 사제의 도움으로 공부의 기회를 얻었으며, 로마에서 박사학위를 수료하게 됩니다. 그는 사제가 된 이후 그리스와 터키 주재 교황대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 불가리아와 그리스는 정교회가 지배적이었으며, 터키는 이슬람의 지배적이었던 곳에서 활동을 한 그는 가톨릭의 권위와 힘보단 신중함과 타 종교에 대한 이해를 늘렸습니다. 교황대사 시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대인들 12,000명을 구출 피신시키기도 하였으며, 정부에 요청하여 유대인들을 독일로 보내지 않도록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된 그는 당시 프랑스의 어려운 문제들 속에서 중제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에 협력하였던 비시정부가 무너지고 새로 들어선 프랑스 정부는 나치의 협력하였던 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하였는데, 프랑스 정부는 33명의 프랑스 주교들이 나치에 협력했던 문제로 퇴임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하여 나치의 협력자를 숙청하고, 친 나치적인 언론을 모두 폐간하며, 나치에 저항하였던 언론을 부활시키는 등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협력자의 숙청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적극 협력자들 7000명을 사형하였으며, 당시 즉결 심판까지 고려하면 최대 10만 명까지 알려져 있으며, 감옥에 수감된 자는 10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론칼리(요한23세)는 드골과의 만남을 통해 프랑스 주교 33인에 대한 전권을 받게 되었고, 프랑스 주교회의를 통해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하였던 3명의 주교는 퇴임 하였으며, 프랑스주교회의 이름으로 나치정권에 협력하였던 것을 대국민 사과하게 되면서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은 론칼리(요한23세는) 베네치아 대주교에 임명되고 동시에 추기경에 서임되게 됩니다. 그는 대주교가 된 이후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등 대중친화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시스티나 경당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다.

 지난 20년간 교황으로 재위하였던 비오12세가 서거하고 시작된 261대 교황의 선출은 이전보다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 투표의 권한을 가진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만장일치로 이루어지는 교황 선출은 난항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11번의 투표의 부결 끝에 12번째 투표에서 론칼리(요한23세)의 선출이 발표되게 됩니다. 당시 이탈리아 주교들은 프랑스에 표를 주지 않기 위해 이탈리아 출신이며 고령인 그에게 투표를 하게 됩니다. 고령이었던 요한23세를 서로 다른 입장의 추기경들은 절충의 대상으로 다음 교황 선출을 위한 잠정적 교황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이 많은 교황은 짧은 제위 기간 동안 젊은 교황도 하기 힘든 많은 변화를 가져 오게 됩니다.



착한교황 요한23세

 지난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황 무오류성의 교류가 반포된 후 교황은 절대 군주처럼 교회를 통치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교황은 바티칸과 라테라노 대성당, 가스텔간돌포의 별장 단 3곳만을 이동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위적이고 비밀스러운 신비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23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고 가히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 갔습니다. 그는 선출된 후 로마의 아동 병원과 교도소를 방문하였으며, 빈민가를 방문하는 등 그간 교황들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보에 그가 교황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인물이라는 염려도 나오게 됩니다.

 이후 그는 다른 종교와도 대화의 장을 이어갑니다. 영국 성공회의 캔터배리 대주교와 만났으며, 무신론 국가였던 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의 딸과 사위와 만남으로 이어갔습니다. “무신론인걸 알지만 노인의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은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아가 유대교와의 만남에서는 유다와 요셉을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난 터키와 그리스 등에서 교황 대사로 활동하며 얻은 타 종교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간 타 종교를 배척하였던 가톨릭교회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대화를 시작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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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령의 요한23세는 교황에 선출되고 나서 석 달 후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교황청 내의 많은 인사들은 반대를 합니다. 과거 대부분의 공의회는 대부분 교회의 긴급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소집되었었기에 교황청의 일부 인사들은 공의회의 필요성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황은 창문을 열고서 신선한 공기를 집어넣으라고 말하며 공의회를 소집하게 됩니다.

 공의회는 3년의 준비 기간 끝에 마침내 시작이 되었고 1962년 10월 11일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회를 선언하였습니다. 이 회의가 과거 400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고수해 온 노선을 급변시키리라고는 당시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교황은 교회가 현대 세계의 관심사를 정죄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대화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지적했으며, 이 목표들은 회의에 참석한 非 가톨릭 참관인들에 의해, 그리고 회의에 정식으로 참석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첫 회기에는 소수의 대표들, 동방 정교회 7명(러시아 동방 정교회의 대표가 1명 참석, 당시 러시아는 소련), 영국 성공회 1명, 고(古) 가톨릭 교회(초대교회) 1명, 개신교 9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외부인인 참관인의 위치가 매우 애매하였으나 요한 23세가 교황청 소속 교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관인들의 참석을 중요시하여 어느 참관인들은 분과 위원회나 주교 및 신학자들의 자문을 받기도 하게 됩니다. 따라서 다른 그리스도교회들(정교회, 古가톨릭, 개신교회 등) 공의회에 더욱 호응하여 폐막식 때에는 참관인의 숫자가 늘어나 28개 교회에서 93명의 대표들이 참석하게 됩니다. 그만큼 가톨릭의 변화는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립한 여러 국가와 신흥국 출신들의 주교들이 다수 참여하면서 가난한 형편의 국가의 가난한 자들의 곤경을 실감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비기독교 세계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자 했으며, 또한 독선적으로 정죄하기보다는 이해와 동정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는 가톨릭이 현대 세계와의 관계에 더욱 적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원동력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교황 요한23세는 자신이 소집한 공의회가 최초의 결의문을 선포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1963년 6월에 선종하게 됩니다.



세상을 향해 변화하는 힘

 이렇듯 20세기 후반 가톨릭교회는 수 세기에 걸쳐 현대 세계의 도전에 대해 대결과 정죄로 일관했던 자세를 버리고 현대 세계와의 대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이러한 가톨릭의 변화는 가톨릭 신도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나아가 비기독교인인 세계의 많은 자들에게 가톨릭교회 안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에너지는 우리가 잘 아는 ‘마더 테레사’와 ‘헨리 나우웬’으로 연결되어 사회의 고난과 어려움을 함께 하려는 자들로 이어졌으며, 교황 또한 권위적이고 신비주의가 아닌 대중을 대변하고 위로하며, 냉전과 같은 세계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세상을 향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위한 목소리를 내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작이 서두에서 말하였던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시간에 이루어졌던 일련의 상황을 당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교황은 가정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아버지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건넴을 통해 가장 권위적인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세상과 대화하며 변화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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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양성주
기획지원팀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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