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를 맞이하며

 나의 유년기 놀거리는 동네 골목길에서 축구나 구슬치기를 하다가 저녁때가 되면 온 식구가 김일 선수의 레슬링을 보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변변찮은 스포츠 경기 하나 없던 10대 시절이 지나고 대학에 입학한 80년대가 되자 마침내 우리나라에도 프로야구 시대가 열렸다. MBC 청룡(현 LG 트윈스) 팬으로 시작한 나의 야구 응원은 ‘불사조’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박철순 선수를 좋아하게 되면서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로 옮겨간 역사(?)가 있다.

 90년대 중반, 박찬호 투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LA 다저스에서 활약할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의 선발 경기는 새벽잠을 설치면서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봤던 왕 팬이었다. 박찬호가 승리 투수가 되는 경기는 직장(Credit Suisse 은행)에서 과로와 스트레스로 찌들어(?) 있던 나에게 큰 위로와 활력을 주었다. 비록 새벽잠은 설쳤지만 마치 내가 승리한 듯 뿌듯한 마음에 출근길이 가벼웠던 기억이 있다. 이후 진출한 김병현은 랜디 존슨이 커트 실링과 원투 펀치를 이룬 다이아몬드백스의 마무리를 맡아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룬 선수로서 애리조나의 영웅이 되었다.

 시카고 불스를 6차례나 우승시킨 농구 영웅 마이클 조던과 LA 레이커스의 매직 존슨,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가 미국에 있다면 우리에겐 허재, 서장훈 그리고 현주엽과 같은 스타가 있었다. 2002년 월드컵 경기를 계기로 박지성, 안정환, 구자철 그리고 손흥민과 같은 걸출한 축구 스타들이 탄생했고, 동계나 하계 올림픽 경기는 김연아나 박태환이라는 우상을 탄생시켰다. 대한민국에 골프붐을 일으켰던 박세리 선수는 수많은 세리 키즈(seri-kids)를 만들었으며, 그를 따라 고진영, 박인비, 김세영 선수가 진출해서 성공하게 되니 꿈나무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종목을 불문하고 운동 경기를 좋아했던 나에게 수많은 스포츠 선수들은 여전히 영웅으로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의 추억을 되살릴 때마다 당시의 뜨거웠던 열정과 응원이 기억나서 혼자 킥킥 웃으며 옛날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지금도 친구들을 만날 때면 당시 응원하던 각자의 영웅 얘기를 나누며 추억을 공유하는 기쁨을 나누곤 한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운동선수를 팬으로서 좋아하고 승리를 함께 기뻐할 뿐이지만, 그들을 벤치마킹하면서 선수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는 꿈나무들에게는 범접(犯接)하기 어려운 커다란 거목이자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며, 동시에 모든 기술과 노하우(know-how)를 전수받고 싶은 영원한 스승일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의 영웅들은 더이상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의 대상이 아닌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IMF 시절은 물론 리만(Lehman Brothers)의 파산으로 시작된 금융 위기에도 희망과 성공 의지를 일깨워 줬던 우리들의 히어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들이 누렸던 사랑 그리고 응원을 이제는 제2, 제3의 후배들을 양성하기 위해 환원하고 있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대다수 우리들의 영웅들은 그들의 땀과 열정이 스며있는 경기장에서는 더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TV 예능 프로그램의 고정 출연자가 되어, 방송인으로서 전혀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내고 있다.

 뉴욕 양키즈의 강타자 데릭 지터는 은퇴 후 재정난을 겪던 마이애미 말린스를 인수해서 후배 야구인을 양성하고 있다. 애리조나 야구 영웅 랜디 존슨은 구단 고문으로 있으면서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프로 농구팀 샬럿 호네츠의 구단주로서, 매직 존슨은 LA의 여자 프로농구팀인 스파크스를 인수함으로써 여전히 농구인으로서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 내 기억에 미국의 수많은 스포츠 영웅 중 어느 누구도 TV 오락프로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와 목표는 재능 기부나 후배 양성, 사회봉사 및 기부 등을 통해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야말로 재능의 사회적 대물림이요, 이를 통해 건전한 의미의 사회발전이 한층 더 동력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각자의 종목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인은 돈을 벌면 병원을 짓고, 문화센터를 기증하고 장학 재단과 학교를 설립한다. 학자는 정신과 육체를 구원하기 위한 연구를 하며, 발명과 저술을 통해 편리한 삶을 실현하며 직업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한다. 의료인은 생명을 구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삶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한 연구에 매진한다. 사람들은 이들의 공헌과 업적은 공기 마시듯 당연시하고 책무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유지하고, 때로는 가혹할 정도의 희생과 헌신을 기대하기도 한다. 불현듯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방송 연예계 주변을 배회하는 스포츠 영웅들의 책무에 대해서는 또 다른 기준의 잣대가 있는 것인가? 삶의 윤활유가 되는 연기(演技)와 웃음은 배우와 개그맨들의 몫이다. 어린 시절 나의 영웅으로 각인되어있는 그들이 실없는 말과 행동으로 오락 프로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허탈한 마음이 드는 건 특별히 예민해서일까? 선배의 발자취를 따르겠다고 지금도 땀 흘리고 있는 어린 선수들은 연말 방송국 연예 대상 시상식에 후보자로 올라있는 자신들의 영웅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대다수 스포츠 영웅은 성공적인 상위 몇 프로의 특출난 월급쟁이보다 훨씬 많은 부(富)를 축적하고 은퇴하게 된다. 살아생전 별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얘기다. 은퇴 후에도 적절한 대우를 받으면서 후배를 양성하거나 자신의 종목과 관련된 일을 한들 절대 궁핍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속 영웅들이 자신이 땀 흘렸던 경기장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시청률을 올리느라 애쓴 댓가로 몇 개의 광고를 찍었다는 기사...... 그리고 훗날 강남 어딘가에 또 다른 건물을 매입했다는 뉴스는 이제 더이상 접하고 싶지 않다.

국제사이버대학교 총장
경영학 박사 이 경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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