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JCU 연 Quarterly Webzine 2019년 spring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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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해를 맞이하며

 태어나서 처음 신년 일출(日出)을 보러 동해를 찾았다. 라디오에서 날씨가 좋아 바다와 하늘을 선명하게 볼 수 있겠다는 흥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소 들떠서 도착한 설악산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듬직한 모습에 반가웠는데 순간 골짜기를 거슬러 올랐다가 다시 산기슭 해송(海松)들을 흔들며 내려오는 속초의 바닷바람이 서울 사람들 까불지 말라며 매섭게 뺨을 때렸다. 새해 첫 일출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동해의 만만치 않은 날씨를 거역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여장을 풀고 콘도 식탁에서 울산 바위를 마주 보며 2019년의 아쉬움과 좋았던 추억들을 생선회 한 접시로 달래 봤지만, 왠지 가슴 한구석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에도 손이 가다 말고 신년의 기대감에도 흥분보다는 오히려 차분 해지는 나 자신을 느끼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 뭐가 문제일까 생각해 보았다.

 필자는 대다수 사람처럼 신정(新正)에 부모님을 찾아뵙고 세배(歲拜)드리는 일을 당연한 일상으로 지켜왔다. 이 같은 일상이 결혼 이후 계속됐으니 벌써 수십 년 가까이 된다. 하지만 몇 해 전 부친에 이어 지난해 어머니마저 하나님 곁으로 가시고 난 후 올해 처음으로 부모님 두 분 모두 안 계신 새해를 맞이하게 됐다. 이렇듯 일상이 된 정월 초하루 본가 방문을 이제는 더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요즘 느끼는 공허함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명절은 부모님을 찾아뵙고 존경과 사랑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시간이지만 뒤돌아보면 이런 가족 모임이 항상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는 사랑과 보살핌에 목말라 하고 다른 이는 더 많은 재물을 욕심내기도 하며, 어떤 이는 그동안의 희생과 헌신을 인정받지 못했다고 불평을 한다. 부모님은 언제나 똑같은 양(量)의 사랑과 당부를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베풀면서 항상 부족함을 미안해하시는데 자손들은 항상 더 받길 원하고 늘 자신만 가진 것이 적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하면 병상에서도 늘 다 큰 자식 걱정에 당신 아프신 사실을 잊을 정도였으니 이제는 안 계신 부모님 자리가 너무 크게만 느껴진다.

 올해로 101세가 되신 철학자 김형석 명예교수는 열정적인 강연과 기고(寄稿) 활동으로 후배 학자는 물론 일반 독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계신 원로이시다. 그분이 이번 신정에 기고하신 글의 제목이 “세배(歲拜)하고 싶다.”이다. 본인의 나이가 한 백 년을 넘기게 되니 부모님은 고사하고 선배 학자는 물론 친하게 교류하던 후배들까지도 대부분 작고했기에 다시는 새해 첫날 찾아뵙고 세배를 나누면서 덕담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됐음을 아쉬워하며, 그 옛날 세배 다니던 시절이 너무도 그립다는 이야기를 애절하게 표현하셨다. 김 교수님의 글에 기억나는 한 구절이 있다. “추억할 일이 많아진다는 것은 살날이 적어진다는 뜻이다.” 신년세배 다니던 시절 느꼈던 스승과 선배 교수들과 즐거웠던 많은 일을 추억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이 유한(有限)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주어진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할 것이며, 그 시간이 또 다른 후생(後生)들에 의미 있는 추억이 되기 위해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마친다. 백 세가 넘으신 노(老)학자의 다짐과 결심이 필자로 하여금 새삼 가슴 뭉클한 자각심(自覺心)을 갖게 하면서 한편으로 경건한 마음마저 들게 했던 기억이 있다.

 김 교수님의 “세배드리고 싶은 마음”을 필자도 가슴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분과 비슷한 처지라서 그럴 것이다. 명절이 와도 찾아뵐 부모님이 안 계신 세상의 모든 자식은 하나같이 같은 마음일 거란 생각이 든다. 부모님 잔소리가 반복되어 다소 거슬러도 혹은 형제들 간 의견 충돌로 가끔은 식탁에서 큰 소리가 오고 갈지라도 모락모락 김이 나는 어머니가 떠주신 떡국 한 그릇을 먹으면서 내가 좀 과했나 하고 후회하며 어색하게 웃던 순간이 매년 이때가 되면 새삼 그리울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추억을 이제 더는 할 수 없지만 그 빈 공간을 자식들이 자라면서 대신해주고 있으니 세대교체라는 것이 바로 이게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도 어느덧 추억할 대상과 시간이 남아 있는 시간보다 많은 나이가 된 것 같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많고 적음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믿는다. 시간의 장단(長短)보다는 얼마나 많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추억거리를 만들어 가느냐가 남은 여정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추억들이 모두 아름답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등장하는 다른 이들의 추억에서만큼은 좋았던 대상으로 기억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이 목표를 올해 새롭게 워너비(want to be)의 하나로 설정하고 이제부터라도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새해 첫날 이른 아침, 동해 위를 빨갛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일출(日出) 옆으로 문득 어머니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동해 바람이 목덜미를 돌아 귓가를 스치며 익숙한 목소리를 싣고 왔다 “둘째야! 바람이 엄청난데 목도리는 단단히 하고 나온 거니?”

이경우
국제사이버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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