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JCU 연 Quarterly Webzine 2019년 spring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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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先進) 시민의 조건

 지난번 기고를 통해 자신을 추스르고 타인을 존중하려는 노력과 습관이 높은 수준의 공동체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조건이라는 필자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규율(discipline)과 통제(control),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respect)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결심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까? 이번 글도 우리들의 작은 시도와 행동 습관의 변화가 주변을 바꾸고 나아가 사회를 계도(啓導)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 접근 방법으로 ‘개인공간 배려’‘원칙과 룰(rule) 중시’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회학에서 ‘사회적 상호 작용’을 설명할 때 표면영역, 이면영역 그리고 개인영역이란 개념을 동원한다. Edward T. Hall은 개인영역(個人領域)을 네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했는데,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대중적 거리(Public Distance)가 바로 그것이다. 개인영역 공간은 프라이버시가 중시되는 공간인데 양보와 배려를 전제로 사생활이 존중될 때 성숙한 공동체 관계가 완성될 수 있다. 개인영역에서 ‘친밀한 거리’나 ‘개인적인 거리’는 부모와 자식 혹은 부부나 연인들 사이의 밀착이기에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는 서로 모르는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거리이기에 특히 배려와 양보가 필요한 것이다.

 공공질서와 규범이 잘 지켜지고 ‘사회적 거리’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시민들이 모인 곳을 보자. 누군가 불가피하게 타인 앞을 지나치게 될 때 하나같이 던지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듣던 안 듣든지 간에 ‘실례합니다(excuse me)’라고 습관처럼 말한다. 행여 기침할 때는 어떤가? 누가 보든 안 보든 예외 없이 같은 말이 나온다. 식당에서도 큰 소리로 떠들기는커녕 음식 씹는 소리도 남에게 방해될까 주의하는 배려가 습관처럼 나온다. 반대의 경우를 떠올려 보자. 지나치면서 어깨를 부딪치든 발을 밟든 나 몰라라 한다. 내가 가는 방향을 가로질러 부딪칠 듯 지나가면서도 미안한 생각이 없다. 오히려 자기 가는 길에 왜 알아서 멈춰 서지 않느냐고 인상을 쓰기도 한다. 문화 강국, 경제 강국인 선진국에서 지나가다 어깨 부딪혔다고 서로 칼부림했다는 뉴스를 접해본 기억이 없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작은 일들 같지만, 이런 사소한 일들이 공공의식의 기초가 되고 ‘배려’와 ‘양보’의 토양이 되어 궁극적으로 원칙과 룰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 낸다고 믿는다.

 과거 TV 프로그램에 연예인들이 남녀로 편을 갈라서 각종 게임과 퀴즈를 풀면서 승자를 가리는 오락 프로가 있었다. 프로 말미(末尾)에 사회자의 ‘몇 대 몇’이란 외침 그 자체가 유행어가 됐고 워낙 인기 있는 장수 프로라 사회적 영향력도 무척 컸던 프로였다. 하지만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시청하면서도 간혹 원칙 없는 판정을 하는 사회자의 독단(?)에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분명 사전에 고지된 규칙이 아닌데 사회자의 주관적 판단으로 덤으로 점수를 더 주기도 하고 깎기도 한다. 어떤 때는 특정 출연자의 애쓴 노력이 가상하다는 이유로 가산점수를 주는 바람에 게임의 결과가 룰에 의해 좌우된다기보다는 분위기나 동정심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서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무원칙 속에서 일부 연예인들은 이기기 위해 애교 섞인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고 가끔은 속이기까지 한다. 재미있거나 웃음을 준다면 그까짓 부정행위도 벌점은커녕 용인되거나 묵인된다. 최근의 인기 TV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들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편법과 속임수를 마치 재미를 위한 것인 양 수시로 남발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미디어 매체의 프로그램들이 의도하던 안 하든지, 사회상을 반영하든 혹은 사회상 형성에 영향을 주든 관계없이 우리의 도덕과 윤리 기준치를 결정하는데 일정 부분 음(-)의 영향를 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재미와 웃음을 위해 때론 원칙과 룰이 무시되어도 괜찮다는(?) 인기 장수 프로를 보고 자란 우리 아이들은 과연 어떤 가치관을 갖게 될까? 웃음과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편법이 용인되고 주관적이고 즉흥적인 판단으로 추가점수가 남발되는 걸 보고 자란 애들이 사회의 일원이 됐을 때 누군가 법과 규정을 엄격히 지키라고 말한다면 과연 무슨 생각과 행동을 할지 걱정이 된다. 잘못 적용된 배려와 관용은 원칙과 룰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우리가 겪었던 수많은 후진국형 사고와 비리들도 결국 작은 무관심과 양보 없는 이기주의, 의식 없이 전파된 잘못된 배려, 무원칙의 관용 그리고 재미를 가장한 편법들이 우리 주변에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 르네상스를 주도한 문화 강국도 산업 혁명을 주도한 경제 강국도 아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선도 국가의 하나로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됐으며, K-Pop과 K-Drama를 앞세운 K-Culture 전파자로서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세계 젊은이들이 한국을 동경하고 우리 문화를 흠모(欽慕)하는 시대다. 이에 걸맞은 시민의식이 필요한 때다. 타인의 영역을 존중하는 배려와 양보가 절실하다. 정해진 규칙과 룰을 지키고 존중하는 성숙한 공중도덕이 습관처럼 표출되어야 한다. 재미나 웃음을 명분으로 속임수나 편법을 묵인하는 세태(世態)도 이제는 퇴출시켜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쉽게 지나치고 가볍게 받아들인 공간(空間) 침범의 심각성도 그 나쁜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더이상 그냥 넘길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저급한 공중도덕과 윤리 의식으로는 결코 선진국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경우
국제사이버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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