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JCU 연 Quarterly Webzine 2018년 Spring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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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특수상담치료학과 교수 칼럼 특권이 정의와 배려를 마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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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에서 번호표를 받고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것은 어김없이 때가 되면 내 순서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개적이고 예측 가능한 절차이기 때문에 어떤 이도 불평이 없다. 그러나 은행직원을 아는 사람이나 돈을 많이 예금하는 사람이 나보다 늦게 와서 먼저 일을 본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 누구도 번호표를 신뢰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내심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불평등에 대해 우리가 다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특권에 대해서는 그것이 공개적으로 용인될 때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인정한다. 예를 들면 독립유공자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특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절차와 선정에 있어 문제가 생기면 특권을 이해하고 수용하기가 어려운 지점이 생긴다.

 나는 언제 도덕적 감동과 분노를 느끼는가? 한 기사에 나온 일화는 내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7살 정도로 보이는 손자가 할머니 대신 손수레를 밀고 올라가다 정차된 차량의 옆면을 긁었다. 하필 그 차는 아우디였는데 할머니는 경황이 없어 어쩔 줄 모르고 손주는 할머니만 바라보며 울먹였다. 10분 정도 지나서 (차 주인인) 40대로 보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왔다. 주인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차를 주자창에 주차 시키지 않고 도로변에 주차해 통행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손주가 부딪혀서 죄송합니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는 연신 울먹이는 7살짜리 애를 달랬다 한다. 외제차 이야기가 나왔으니 기사 하나를 더 기억을 더듬어 쓰자면, 어느 좁은 골목에서의 일이었다. 119차가 삐용삐용 거리며 급하게 골목을 들어섰는데 그 골목은 이미 차들로 꽉 차 있었다. 그중 큰 대형 외제차가 있었는데 119차가 아무리 차를 틀어서 그 차 옆을 지나가려해도 여의치가 않았다. 그러자 그 외제차 주인은 창문을 열고 크게 소리쳤다.

 “그냥 긁고 지나가요. 어서!”

 이 두 가지 일화는 내게 ‘우리가 함께 살고 있구나’ 하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물질이 우선인, 손해를 감수하는 일은 바보 같은 일이며 손해에 대한 보상은 법적 다툼을 해서라도 기어이 보상받아야만 야무지다는 소리를 듣는 세상이다. 그것은 정의이며 당연한 권리이다. 그런데 차 주인은 어린아이와 할머니를 외제차라는 물질보다 우선시 하였다. 또 119가 구해낼 생명을 외제차라는 물질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였다. 어린아이와 할머니 그리고 위급한 생명에 대하여 자기 생명과 동등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용기 있는 혹은 다소 호기 있는 행동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외제차 주인의 생명에 대한 배려는 도덕적 감동을 일으키기에 아주 충분하였다.

 땅콩회항으로 유명한 회사가 또 일을 쳤다. 소유주로서의 특권을 갑질로 내팽개쳤다. 우리가 분노한 것은 그들의 특권이 아니라 그 특권을 이용해 타인을 모욕한 것이다. 기가 차게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소위 ‘금수저’라는 행운과 특권을 가장 천한 방식으로 소비해 버린 꼴이다. 이럴 때 우리는 정의란 이름을 떠올린다. 정의론 하면 존 롤즈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가 말한 정의는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인데 그 판단의 기준은 공정(fairness)이다.

 공평과 정의는 도덕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과연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구심쯤은 다음의 일화에서 날려버릴 수 있다.

아들을 둘을 둔 아버지가 넓은 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두 아들은 공평하게 아버지 재산을 나누려니 싸움이 없을 수 없었다. 큰아들이 생각하는 공평과 작은아들이 인식하는 공평이 달랐기 때문이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땅에 지적도를 펼쳐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논, 밭, 과수원과 우물, 도로, 주택 등이 섞여 있는 아버지의 땅을 공평하게 나누기가 불가능 해 보였다. 식구가 많은 형은 형 대로, 새살림을 차려야 하는 동생은 동생대로 이렇게 저렇게 챙겨야 할 요인들이 적지 않았다. 드디어 아버지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형이 나누고 동생이 선택하라.” 아버지의 유산은 공평하게 두 형제에게 나눠졌다.

 서로의 처지가 다른 상태에서 서로가 다른 공평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회는 늘 다툼으로 가득하다. 어차피 이 세상의 삶이란 공평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예쁘게 태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부터 연봉이 10억 인 사람이 있지 않는가! 불평등한 조건을 견뎌야 하기에, 더군다나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인간 의식은 늘 공평을 열망하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숨 건 투쟁을 해 오지 않았던가! 우리의 삶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인간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을 의식한 사람들은 성공적인 삶을 이루기 위해 처세술을 익힌다. 이런 삶의 기술이란 처벌을 피하면서 최대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기술이다. 우리네 삶은 은행 번호표처럼 누구나 기다리면 그 순서가 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의와 평등은 맥락적이며, 고정된 도덕성을 전제하기 어렵다. 시대마다 처세술은 고정되지 않은 그 사회의 도덕성에 의지한다. 물론 도덕도 개인의 삶의 태도와 그것에의 의지에 의해 변화한다. 앞서 언급한 외제차 주인처럼 특권을 가진 자의 인격이 ‘배려’로 변할 때 우리시대의 도덕성은 품격이 높아진다. 사람의 삶의 격이 올라간다. 아쉽게도 ‘땅콩집’은 특권만 알지 배려하는 기품을 배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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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국제사이버대학교 특수상담치료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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